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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2~191206

​191202~191206


191202 월

다사다난한 한 주를 보낼 거라 생각을 못하고 다음 날부터 시작될 고사기간을 기대하고 있었음. 남자친구와 저녁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뭘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191203 화

남자친구는 뜬금없이 선물이라며 뭔가를 줄 때가 종종 있는데 여성청결제(사려고 고민하던 거라서 받았을 때 좋았음), 투명 폰케이스(엄청 얇은데 튼튼하고 그립감 좋게 옆면에 오돌토돌한 마감처리까지 되어 있다면서 무척 자랑하며 줬음...누가 보면 제작자인줄ㅋㅋ), 홍삼 한 박스(대체...) 등등...

이번에 집에 놀러온다길래 어 그래 했더니 으랏샤 하고 내미는

마약베개...

아이쇼핑 금지 선언을 내렸음. (남자친구는 무척 슬퍼했다.)

​그래도 일단 무척 마음에 든다는 (척하며) 얼굴로 인증샷까지 남기는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근데 난 엄마가 사준 베개가 더 좋아 소근소근.



191204 수. 본가에 내려감.

선생님들 시험지 세는 거 도와 드리면서 좀 띵가띵가하던 와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옴. 일과 중에, 그것도 오전에 전화를 하는 건 거의 없는 일이어서 무슨 일인가 싶어 바로 받았다.

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오늘 바로 집에 좀 내려와야겠다고. 간략히 얘기 들은 다음에 곧장 본교무실 가서 교감샘 교무부장님 돌아다니며 허겁지겁 특별휴가 상신. 마침 고사기간이라 일찍 퇴근 가능, 남자친구가 본가까지 태워다준대서 오늘 만큼은 괜찮다는 말 없이 허겁지겁 집에 가서 짐 챙겨서 탑승.

집에 내려옴. 이미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던 엄마가 맞아줌. 생각보다 당장은 엄마가 괜찮아보여서 안심. 그리고 엄마에게 자세한 이야길 들었다. 그 후에 씻고 잠시 침대에서 휴식. 저녁 쯤에 모든 가족이 집에 집합. 급히 휴가 내고 서울에서 자가용 타고 달려온 오빠와 언니는 떡실신. 이틀 전부터 포항에서 여기까지 왕복 4시간을 왔다갔다하며 장례식장 일처리 모두 도맡아 한 아빠랑 삼촌도 마찬가지로 파김치.

이상하게 평화롭고 일상적인 저녁을 보냈다. 엄마아빠 둘 다 저녁 차릴 정신이 없어서 중국집에서 간짜장과 탕수육을 시켜 먹음. 아빠가 부먹이어서 소스 부어라~ 할 때 조금 화났지만 오빠랑 언니가 찍먹이어서 탕수육 무사히 사수해냄.

그리고 다 함께 엠넷뮤직어워즈 보다가 잠듦.



191205 목. 포항으로. 발인하는 날. 장례식장. 화장터. 

전날과는 전혀 다른 아침 분위기. 다들 까만 옷을 챙겨 입고 차에 탑승. 네비게이션에 포항시민장례식장 찍으니 1시간 40분 걸림. 침묵 속의 출발.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손님으로 왔다 가는 게 아니라 장례식의 모든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직계 가족의 입장은 처음이었는데

이것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으면. 절대 갈 일 없었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앉아 복잡한 머릿속과 마음을 달래면서도 이 생각은 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장례식장에서 관 작업을 할 때까지는 모두가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장터에 가서는... 화장하기 직전, 그러니까 관을 불에 태우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인사할 시간을 줬다. 가족들 모두 들어오셔서 관 위에 손을 올리라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모두 손을 올려 관을 만졌다 놓아주었다. 

그때 그 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떠나보낸다는 느낌. 분명 내가 기억하고 있고 알고 있고 살아있다 소식 듣던 사람이 다시는 못 만날 곳으로 영영 떠나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은 너무나 슬펐다. 큰 아빠와 좋은 기억이랄 게 거의 없다시피 하고, 요 몇 년간은 가족들과 연을 끊었다 싶은 상태로 아빠를 제외한 가족들은 연락조차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눈물이 줄줄 났다. 서로 호칭과 이름과 기억을 나눠 가진 사이라는 것은 도무지 무시 못 할 일이다.


사실 소식을 듣기 2주 전에 큰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개인적으로 전화를 해온 것은 몇 년 만인데. 술을 지나치게 많이 드시고 도무지 정착이란 걸 못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 보이는 큰아빠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근데 큰아빠는 나를 딸, 우리 딸 하고 부르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날 전화가 와서도 딸내미 하고 반갑게 부르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은 거다. 역시나 술에 잔뜩 취해서는 무슨 말인지도 모를 횡설수설을 하시고 나는 대충 대답을 하다 전화가 끝났다. 그게 내가 가진 큰아빠와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죽기 2주 전에 나눈 마지막 대화를 나는 그런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겸허해지며 또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구나.


이제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못 한다는 게 더 정확하지만... 눈 앞에서 보고 나니 그것에 대해 말하기에는 내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이제 장례와 화장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의 장례식도 상상해봤다. 만약 내가 누구보다 먼저 죽는다면... 내 장례식장에 기꺼이 와줄 사람들과 아마도 울어버릴 사람들을 차근차근 떠올리다 이런 것은 이제 상상도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거기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상실의 구체적인 형상이란 그 이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들이 품고 가기에 너무나 크고 버거운 모습으로 확실하게 존재했다.

사람들은 잃지 않는다. 잊었던 것도 떠올려내고 더 많은 것을 품에 안게 된다. 떠난 사람이 남긴 모든 것도 물론 함께다. 평생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 있는 사람은 삶이 그런 식으로 자꾸만 무거워진다.


이후로는 매일 생각한다. 아빠는 괜찮을까? 이 생각을 매일.



191206 금. 내 과목 시험. 여행 준비.

큰 문제 없이 시험이 끝났다. 내 과목이 1교시 시험이어서 2교시 자습 때 단답형을 바로 채점할 수 있었고 3교시에 바로 오엠알 돌렸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내 걱정(모두 백점을 맞으면 어떡하지??)과는 달리 참 예쁘게도 점수 줄이 서있었다... 공부... 존나 안해 나쁜놈들. 아무튼 올 한 해도 문제 오류나 재시험 없이 두 학년을 모두 말끔히 마무리했다. 나도 고생. 너희도 고생. 우리 모두 해피엔...딩...?


출제 기간부터 준비했던(사실 생각만 했던) 전주 여행을 본격적으로 준비. 남자친구는 싱숭생숭한 내 상태가 걱정인 듯했으나 나는 괜찮으니 계획대로 가자고 하여 일단 가기로 함.


남자친구가 기름 넣고 세차를 하러 간다길래 같이 가봄. 자동 세차기는 너무 신기하다.

차가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1차로 비눗물이 초ㅑ아아아아 나오고 보드라운 수세미...같은 것이 분주하게 차를 닦음

​기괴한 광경1

이러는 와중에 차는 계속 앞으로 전진함


비누칠 끝나면 헹구는 물 부와아아아아 나오고

마지막으로 사방에서 바람이 수와아아아아아 나오면서 마른 걸레가 물기를 허겁지겁 닦아냄

​기괴한 광경2


차 안에 갇혀서(?)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는 게 너무 재밌어서 남자친구에게 또 하자고 했다. 기름을 넣어야만 세차권을 얻을 수 있다고 다음에 기름 넣을 때 또 데려오겠다며 침착하게 나를 달래기 시작함. 야 당연히 장난이지 장난하냐. 철 없는 애 취급을 받고 세차장에서 퇴장.


전주여행 후기는 다음에...

일기 분위기가 널을 뛰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