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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마상

191127

27일 일기지만 28일에 씀.

 

1.

시험 출제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받다가 머리 돌아가는 한계치까지만 꾸역꾸역 내고 제출해버렸다. 출제 시즌이 되면 언제나 하는 생각, 사로 잡히는 불안이 '너무 쉬워서 줄 안 세워지면 어떡하지', 'z점수 엉망 나오면 어떡하지'인데, 올해는 특히 좀 심했던 것 같다. 근데 올 한 해 동안 2,3학년 모두 훌륭하게 나의 생각과 불안을 배신^^하는 결과가 나왔지. 그러면 또 다른 방향의 좌절감에 빠지는데, 애들에 대한 관찰이 부족했나, 학생 수준에 가장 적절한 문제를 고루 내는 게 아직도 서툴러서 어떡하나, 뭐 이런 것들. 근데 올해는 체념도 빨라서 아 이미 지난 일인데 어떡하나. 그래 맞아 난 똥멍청이야... 결론 내리며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2.

이번 2학기 수행평가는 좀 신박한 걸 해보려고 나름 n년 차의 유튜뷰어(ㅋㅋㅋ)의 자신감(?)으로 Vlog촬영하기를 했는데. 처음엔 애들한테 공지해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이걸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나, 평가 기준을 어떻게 명확하고 또 세세하게 세울 수 있을까, 애들한테 너무 부담되지 않을까 등등. 막상 애들이 제출한 결과를 보니 생각보다 훨씬 엉망진창이고 생각보다2 그럴싸하게 만들었고 지들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짬을 내서 찍은 꼬라지(ㅋㅋㅋ)를 보고 있자니 하길 잘했다는 칭찬으로 침착하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주제 선정부터 제작 과정, 편집과 마무리까지 정말로 '수행의 과정'을 집약적으로 모아 둔 결과물. 좋다. '나름'의 노력이라는 걸 인정해줄 수 있는 기회 같아서 정말 좋다. 언제나 '내 나름의 노력'을 무시 당하는 게 익숙한 환경에서 애들은 살고 있으니까. 

 

어느 학교에 근무하든 대한민국의 교사란 비슷한 고민을 하겠지만. 입시에 늘 목졸리며 살아가는 고교 교사란 점수 매기기와 줄 세우기로 애들을 평가하는 일에 점점 무던해지고 또 그걸 당연한 듯 여기게 되어서, 평가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잊고 살게 된다. 채점 기준이 있다면 반드시 상대평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수행평가에서조차 얘와 얘의 점수 차를 두어야 한다는 압박감(또는 습관성 무지)에 끙끙 앓던 2학기 초반의 나를 다시 떠올리며 조금 반성해본다. 올해는 정말 게으르게 교사 생활을 했구나. 지난 날들의 나는 서툴고 부족했으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구나. 올해 가장 능숙했던 건 좌절과 자책과 합리화였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한 해였으니 후회는 하지 않지만 다가오는 내일과 그 다음의 내일들이 두렵긴 하다. 에어백이 없어진 기분.

 

기말고사가 끝난 후에 각 반 별로 상영회만 간단히 할 생각이었는데 원영이의 아카데미 시상식 아이디어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고사 기간에 상장을 제작해두려 한다. 몇 명만 주면 슬프니까 애들에게 어울리는 상 고민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줘야지. 일기를 쓰기 직전까지 네이버에 '상으로 끝나는 단어'를 검색해서 이푸른세상, 어휴이진상, 항상, 마상, 이런 걸 눈에 익혀두다가 아 맞아 설상가상 잊지 말아야지... 메모하고 있었다. 이 흐름과 이 마음가짐이라니. 연말은 연말이구나, 생각한다.

 

3.

남자친구 너무 귀엽다. 매일 매 순간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고 가끔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정신 차려 이 진상새끼야 늘 경고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요즘 소녀시대 노래를 다시 듣고 있는데 i got a boy에서 티파니의 가끔은 오빠처럼 듬직하지만 애교를 부릴 땐 너무 예뻐 죽겠어 부분을 들으며 남자친구를 떠올렸을 때 교무실 책상에 대가리 박고 미친새끼 정신 똑바로 차려!! 중얼 거렸는데 건너편에서 부장님이 놀란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벌떡 일어나셨다. 죄송했다. 흔한 오타쿠입니다 모른 채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라고 할 수는 없었고 문제를 날렸다고 했다.

 

어제 둘 다 출제를 끝내서 기념으로 훠궈를 먹으러 멀리 떠나보자! 했는데. 퇴근 시간이 임박할 수록 급속도로 바닥을 뚫는 나의 체력에 못 이겨 결국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근데 내가 먹고 싶은 게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게의 여러 가지여서 남자친구가 좀 당황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전떡볶이, 명랑핫도그, gs25의 감동란이었다... 세 가게는 모두 어중간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서, 남자친구가 어중간한 위치에 주차를 해두고 부랴부랴 뛰어가고 기다리고 계산하고, 주차-뛰-기-계, 또 주차-뛰-기-계. 세 번 반복한 끝에 모든 메뉴를 겟챠 할 수 있었다. 근데 차에 탈 때마다 장난으로도 짜증 한 번 안 내고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누나 누나가 먹고 싶은 거 사왔어! 누나 이제 얼른 다음 코스로 가자! 누나 다 샀어 이제 빨리 가자 누나 배고파서 난폭해진다! 뭐 그런 말들만 해서 얘는 정말 착하고 바보 같고 귀엽구나! 생각했다.

 

음... 매일 귀여운 에피소드가 하나씩은 있는데 막상 적으려니 잘 생각이 안 난다. 사실 좀 유난 떠는 것 같아서 이런 얘기들은 쓰지 말아야지 생각하다가 그냥 어제는 진짜 진심으로 얘는 대단하다 대인배다 생각했어서 기록해본다.

 

오늘은 둘 다 보충수업도 없고 칼퇴할 수 있어서 진짜로 훠궈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성공할 수 있겠지? 아직 11시 5분 밖에 안 돼서 솔직히 불안하다... 걔 말고 내가... 내 자신이... (지친 피카츄 짤)

 

4.

야자 감독할 때 ㅊㅁ이가 준 트윅스

 

ㅋㅋㅋ나와 남자친구가 사귀는 걸 꿈에도 모르는 ㅊㅁ이는 언제나 나와 남자친구의 연애성사를 기원하며 부지런히 오작교 역할을 하고 있다.  벌써 2개월 가까이 된 듯ㅋㅋㅋ. 며칠 전 야자 감독 중에 불쑥 감독석으로 다가오더니 이걸 내밀면서 '쌤 ㅇㅇㅇ쌤(남친)이 이거 쌤 갖다 드리랬어요'하는 거임. 웃으면서 ㅊㅁ아 꺼져^^;;했더니 굉장억울해하며 온 몸으로 난리 부르스 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바로 남친한테 카톡해서 'ㅋㅋㅋㄹㅇ 니가 주라고 함?' 물었더니 'ㅋㅋ아까 쉬는 시간에 만났을 때 ㅊㅁ이가 야자 짼다길래 야자 째지 말라고 준 건뎅ㅠㅠ' 답장 옴. ㅈㅊㅁ 네 이놈. (빠따를 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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