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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마상

9월 2일 인간성 종말의 종말

01

뭘 했다고 구월인지 모르겠다. 물리적 공간의 이동이 감각의 경험과 사유의 깊이를 달리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코로나 시대의 우리들은 그제와 어제와 오늘의 기억이 흐릿하다고 한다. 물론 코로나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물리적 공간의 구속이 반드시 인간 사유를 게으르게 만든다고는 못한다. 공간은 같아도 시간은 여전히 흐르며 그 속에 존재하는 나는 분명 어제의 나와는 다르다. 하지만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다를 바 없다면 그것은 환경의 탓이 아니라 순전히 관성에 얽매인 내 탓이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려 애썼던 것 같은데도 기억이 흐릿하다면 그건 기록하지 않는 자의 비극적 최후다. 나는 기록을 게을리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상실했다. 정확함을 상실한 것이다.

 

02

수영언니가 맛있다고 많은 칭찬을 해서 나도 언니 입맛을 손민수하여 오드베이커리에서 쿠키를 주문해보았다. 쿠키가 진실로 내 손바닥만하고 부피도 상당해서 처음엔 내가 쿠키가 아니라 스콘을 주문했던가? 착각했을 정도. 보너스로 챙겨주신 바닐라빈파운드케이크와 브라우니도 정말 맛있었다. 쿠키는 거의 식사 대용 같다. 맛있고 든든하고... 나에겐 너무 달아서 먹는 데 무한대의 커피와 하루종일의 시간이 필요하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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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틀 동안 읽은 책. 두 권 모두 두께가 얇은 편이고 이야기 전개가 깔끔하고 속도감 있어서 두 시간 안 팎으로 다 읽었다.

심너울의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김보영의 <역병의 바다>.

역병의 바다는 심해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발생한 원인 불명의 전염병이 인간의 육체를 넘어 세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인 묘사로 이야기해준다. 글을 읽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한 풍경이 눈 앞에 보여서 너무 무섭고 불쾌하고 끔찍했다. 언어의 시각화에 아주 능숙한 사람 같았고 그 재능이 부러웠다. 나는 결말에서 주인공이 선택한 행동이 초래할 결과가 긍정적일 것이라 믿는다. 믿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도록 괴로울 것 같아서. 인간을 믿기에 인간을 믿으려는 게 아니라 인간을 믿어야만 인간으로 버틸 수 있는 모든 너와 나와 우리들을 생각했다.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는 단편 5개가 수록된 글인데 작가의 세계와 사물에 대한 관찰력, 거기서 새로이 뻗어나는 참신한 상상력을 읽는 게 즐거웠다. <정적>이 가장 좋았다. <사람, 장소, 환대>에서 장애우란 단어가 비장애인의 시혜적 태도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오만함-자연스럽다, 가 붙기 때문에 더욱 혐오스러운-을 담고 있음을 설명하는 주석을 읽고 고개 끄덕임 오만번을 했던 것 같은데. <정적>에서 작가의 그러한 고민이 느껴졌다. 소리가 사라진 후 사람들이 떠나버린 신촌에서 카페를 찾기 위해 방황하던 주인공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영업하는 카페에 들어갔는데, 사실 거긴 처음부터 청각장애인을 위한 카페였다. 소리가 사라진 세계가 비장애인들에게는 장애를 주었으나 장애인들에게는 일상 그 자체로서 순탄히 작동한다는 점,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고자 결심하는 주인공에게 카페 주인이 고마움을 표하는데 이 장면을 작가의 말에서는 이게 정말 고마워 할 일인가? 짚어보는 점, 이런 등등이 좋았다. 좋았다...라고 퉁쳐서 죄송합니다. 아무튼. 인지하는 것과 체화하는 것은 다르다. 늘 뇌에 힘을 주고 살아야 한다. 그 외에 4편도 모두 신선한 이야기였는데 정적 만큼의 인상은 없었어서 감상을 적지는 않는다.

 

04

오늘 모의고사라서 감독/공강의 반복으로 무척 여유로운 하루였다. 자거나 핸드폰하면서 시간 낭비할까봐 아침에 각잡고 to do list를 작성했다. 다 지켜서 뿌듯하다. 깜찍한 새콤달콤은 (나에게는) 우리 반 최고 귀염둥이인 친구가 어제 준 것이다. 어제 내가 너무 피곤해서 하루 종일 인간 혐오의 표정으로 다녔더니 야자시간에 교무실로 찾아와 선생님 힘내세욧!! 화이팅!! 하며 주고 갔다. 아주 힘이 났다. 오늘을 잘 살았다. 맛있었다. 이거 어디서 샀니? 알고 싶구나.

 

05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게 일 시작하고 첫 해 마무리하면서. 그 후로도 계속 고민했다. 근데 어디를 가서 무엇을 공부할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원을 가는 건 용납할 수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벌써 몇 해가 흘렀다. 그때 그 시절 안 간 거 후회는 안 한다. 그만한 지적 능력도 안 됐고 일을 그만둘 만큼 확고한 연구 목표도 없었으니까.

고시생 시절과 짧은 서울 살이가 내게 남긴 건 막연함이 주는 희망을 진짜 희망이라 믿지 않는 분별력이다. 그건 불안도 아니고 착각과 권태와 허상의 총체다. 불안이란 말은 원동력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낭만적이다. 낭만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시작점이 아니다. 움직이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길 중에 하나이다. 원동력으로서의 기능을 다했을 때 불안은 낭만으로 작동한다. 거기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불안에 먹히고 불안 그 자체가 되어 인간적 가능성을 잊게 된다. 서울 살이 할 때의 나는 낭만으로서의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한 해 이후에 정신 차리고 자아 찾기에 들어갔다. 나는 내가 교사를 한 2년... 길어야 3년 하고 그만 둘 줄 알았다. 과몰입, 진절머리 뭐 이런 것들로. 근데 잘 참고 잘 해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대충은 못하고 대충 안 할 거면 아예 제대로 해야 하고 제대로 할 거면 잘하기도 해야 하고 잘하고 나면 다음은 더 잘 해야 하는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난 내가 결과가 두려워 먼저 포기하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다른 면도 있었다. 교사가... 적성에는 안 맞는 것 같은데 능력은 되는 것 같아서 아직은 하고 있다. 는 고3 담임 죽어버려.

여하튼간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와서.

가고 싶은(사실은 가야 할) 대학은 정해져 있었는데 과를 못 해서 계속 방황하고 있었다. 과 고민만 5년 했다. ㅋㅋㅋ. 웃겨? 웃어? 웃지 마 장난하나장난둘. 작년부터 애들 생기부 때문에 여러 분야의 공부를 찾아서 하고 올해 고3 담임 되면서는 우리 반 애들 생기부에 다 다른 활동과 탐구를 쓰러면 나부터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 오만가지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알겠는 거다 내가 철학과에 가야만 하겠다는 걸. 사실 정치외교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이 세 가지도 고민했는데 일단 내 학부 전공으로는 접근 자체가 좀 어려울 거 같아서. 아무튼 줄창 내 학부 전공만 갖고 살다가는 대한민국 입시에는 도통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아 꼭 학부 전공 말고 다른 전공으로 대학원 가야지까지는 정했는데.

내 학부 전공 지원 자격은 영어 시험 점수랑 연구 계획서, 입학 시험인데 입학 시험 개어려워. 뭐야 이게?

철학과 가려니 졸업 논문(물론 없으면 안 내도 된다지만), 제2외국어 시험을 쳐야 하는 거임? 뭐야 나 서철 하고 싶은데 서철하는 사람은 독어랑 불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대. 이게 무슨 소리세요 아리스토텔레스세요? 아니 저 불어 3개월 하고 그만뒀는데요? 근데 제2외국어는 둘째 치고 대학원 입학 시험 기출 문제를 보는데 하나도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개똥도 모르겠어.

내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껴서 모든 창을 끄고 책상에 머리 박고 반성했다. 그리고 3분 후에 일어나서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뭘 공부하고 어떤 자격증을 따야할지 정리했다. 읽어야 할 도서 목록도 추렸다. 왜 이렇게 살았지. 왜 그렇게 공부 안 했지. 이런 생각할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거나 책 한 장 더 읽는 게 낫다. 반성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우울하거나 낙담할 수가 없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 드럽고 치사하고 개똥같고 존나 멋있는 것 같아서 무조건 2년 내로 철학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못 가면... 대학원은 못 갔지만 존나 멋있는 교사로 계속 살면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고 눈 앞에 닥친 공부 계획이나 잘 지키자.

 

06

내일부터 6시 기상해서 아침 요가/공부 또는 아침 운동 둘 중에 하나 선택해서 매일 해보려 한다. 당분간은 야근 11시까지는 무조건이라서 퇴근 후에 1시 안으로 자는 것이 목표. 잠을 충분히 자야 좋다는데 요새 너무 일이 많아서 공부할 시간이 턱 없이 부족하다. 그럼 잠 줄여서 공부해야지 어쩔 수 없다. 끼니 잘 챙기고 영양제 잘 먹는 것도 중요.

헤르미온느가 부럽다. 학부생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놀았을까? 고등학생 때 나는 왜 그렇게 잤을까? 근데 다시 돌아가도 난 그렇게 살 거 같아서 사실 별로 후회는 안 된다. 그냥 으유 이 멍청아 니땜에 내가 고생이다 으휴으휴으휴 하며 고통스러워할 따름이다. 언제나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 내 자신이 남탓충이 아닌 것만으로도 사실 감사하다. 

 

07

강의 하나만 듣고 이제 자야지. 아 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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